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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은평치과 대표원장 이영만 박사, "의사는 무엇으로 사나?"
치협 31대 기획이사 이영만 박사, '선교사 알렌의 소명의식으로 환자 치료' 밝혀
▲ 올해 6월 11일 서울 은평구 소재 서광교회(담임목사 이상대)에서 다문화가족을 대상으로 서광다문화가족지원센터 제2차 무료의료봉사가 열렸다. 은평치과 대표원장 이영만 박사는 이날 진료진과 함께 다문화가족 대상으로 무료 의료진료 봉사를 진심을 다해 봉사에 참여했다. KDSN, 은평치과 제공
 [한국다선뉴스] 최선규 기자 = 은평치과 대표원장이자 치협 31대 기획이사 이영만 박사는 지난 8월 25일 게재했다.

(사)한국다선예술인협회(회장 김승호) 시인으로 문학과 예술에 힘쓰고 있는 이영만 박사는 "의사는 무엇으로 사나?" 제목의 수필을 게재했다.

이영만 박사는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의 소명의식을 일례로 들며, '알렌의 소명의식으로 환자를 치료하며 연구하는 삶을 살겠노라' 고 수필을 통해 소신을 밝혔다. 


▲ 올해 6월 11일 서울 은평구 소재 서광교회(담임목사 이상대)에서 다문화가족을 대상으로 서광다문화가족지원센터 제2차 무료의료봉사가 열렸다. 은평치과 대표원장 이영만 박사는 이날 진료진과 함께 다문화가족 대상으로 무료 의료진료 봉사를 진심을 다해 봉사에 참여했다.
 
다음은 대금 이영만 박사의 "의사는 무엇으로 사나?" 수필 전문이다.

"의사는 무엇으로 사나? 이영만 박사의 수필 전문

의사는 무엇으로 사나? ①

선교사이자 의사로서 뜨거운 사명감 가졌던 알렌의 소명의식
환자 치료하며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개발해온 치열한 삶

대개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기록은 교과서나 백과사전에서 몇 줄로 요약되기 마련이다.

네이버에서 ‘알렌(Horace Newton Allen)’을 검색하면 다음과 같이 뜬다.

‘고종 당시 미국 선교사이며 외교관이요 의사(1858~1932년). 한국명은 안연(安連). 미국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에서 출생했다. 1881년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이학사 학위를 받고, 1883년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북장로교에서 의료선교사로 중국 상하이에 파송되었다. 1884년(고종 21년) 한국 최초 의료 선교사로 내한하여 미국 공사관에서 의사로 근무하던 중 갑신정변 때 부상당한 고종 황제의 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하였다.

이로 인해 1885년 왕립병원 광혜원(廣惠院, 濟衆院)을 설립하게 되었고, 의료 사역에 매진한 공로를 인정받아 1886년에는 대한제국으로부터 정2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받기도 했다. 1887년 미국 워싱턴 주재 한국공사관 고문으로 일하면서 청국(淸國)의 간섭을 견제하는 데 많은 애를 썼다.

그 후 1890년 7월 9일 북장로교 선교부의 위촉을 받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었고 총영사 대리 공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본격적인 외교 행보를 보여 경인철도 부설, 전력회사 설립 등에 관여하였고, 1890년 미국 전권공사가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 일본을 규탄하고 한국 입장을 옹호하다 중립 노선을 취하는 루즈벨트에게 파면되었다. 그 후 미국으로 귀환하여 의사로 지내다가 여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KOREAN Tales」, 「THINGS Korean」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록만 가지고는 열악하고 험난했던 시대상황 속에서 알렌의 삶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는지 실감할 수가 없다.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솟구쳐 일어난다는 게 쉽지 않다.
치협 31대 기획이사 이영만 박사, '선교사 알렌의 소명의식으로 환자 치료' 밝혀
 
알렌이 부인과 갓 태어난 아들을 상하이에 두고 1884년 9월 14일 ‘난징호’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 요코하마와 부산을 거쳐 제물포에 도착한 것이 9월 20일.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는 9월 22일 오전 8시에 나귀를 타고 제물포를 출발하여 오후 4시경 남대문에 도착, 한양에서의 첫 밤을 여인숙에서 지내고 다음날 푸트 미국 공사를 예방한다.

1885년 1월 22일,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채 두 달이 안 되었을 때, 알렌이 병원 설립을 위해 조선정부에 제출한 탄원서를 보면 그의 열정적이고 진실된 마음이 느껴진다.
 
‘최근 사태 이래 본인은 총격전으로 발생한 조선인 중상자의 신체에 박혀 있는 탄환 제거 수술을 했고, 다른 부상병을 치료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 환자들도 진료한 바 있습니다. 본인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대다수 환자들은 본인의 저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으며, 더군다나 민영익을 비롯하여 청국군 병정들을 치료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해야 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환자집까지 왕진 치료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만약 조선 정부가 본인에게 병원 설비를 갖추어 준다면 서양의술로써 환자들을 치료하고, 이에 대한 보수는 청구하지 않겠습니다….’

당시 알렌은 약관 26세였다. 그가 개화기의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설립하는 등 놀라운 역할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이자 의사로서의 뜨거운 사명감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야말로 소명(召命, calling)의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내가 의사로서 알렌의 삶을 그려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마음에 새기며 의사로서의 생업을 시작할 때 과연 나의 마음 한가운데는 어떠한 소명감이 있었는가.

알렌은 내게 “의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변치 않는 소명감을 간직하고 있는가”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하는 것 같다.
 내가 치과의사로서 스스로 자부심을 갖는 것은 숱한 난관과 우여곡절 가운데서도 오늘날까지 환자를 치료하면서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개발하며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점이다.

(‘응력분산 날개형 임플란트 고정체’ 등 임플란트 관련 특허를 6개 보유한 발명가로서 내가 의사 알렌의 족적 가운데 주목하는 또 한 가지는 그 역시 발명가로서도 활약했다는 점이다.

철도사업에도 관여했던 알렌은 조선의 난방 시스템인 온돌을 기차에 활용하여 '온돌 난방 객차' 특허를 제안하기도 했다.)
 
날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가운데서도 매주 목요일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치의학교육연수원 강의를 들었고, 7월15일 수료식에서는 우수상을 수상했다. 시간을 쪼개 봉사활동도 계속 이어가는 한편, 노래 짓는 작사가, 노래하는 가수로서도 열심을 내고 있다. 이러한 일인 다역의 생활이 언제부터인가 몸과 의식에서 떨쳐내기 힘든 습관처럼 돼버렸다.
치협 31대 기획이사 이영만 박사, '선교사 알렌의 소명의식으로 환자 치료' 밝혀
 
문득 헤아려보니 올해 계묘년은 58년 개띠생인 내가 딱 60 중반이 되는 해다. 아니 벌써? 하는 느낌이 뒷머리를 친다.
 
시쳇말로 인생열차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고 한다. 50대에 시속 50km의 인생열차는 60대에는 60km로 빨라진다는 것이다.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이제부터 인생 3막 1장인가 싶기도 하다. 올해 103세가 되신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말을 곱씹어 보게 되는 까닭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세 사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1961년 미국에 갔을 때 가장 부러웠던 것은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이었다. 백인 교수들은 모두 그렇게 믿고 있었다. 지금 내가 “노년기는 언제부터인가”라고 물어보는 것은 성장이 끝나기 시작하는 때를 더듬어 보자는 뜻이다. 만일 성장이 끝나는 75세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늙기 시작하는 것은 75세부터라고 보아 좋을 것 같다. 그러다가 80세가 되면 노년기가 된다. 그 나이가 되면 옛날로 돌아갈 수 없는 나의 인생이 정착되거나 평가의 대상이 된다.’
대금 이영만 박사와 다선 김승호 발행인
 

#이영만 #은평치과 #다선뉴스 #한국다선문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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